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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팔달산) 본문
수원을 읍치로 만든 사통팔달한 산
팔달산은 '사통팔달하여 막힌 데가 없는 수원'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준다. 수원시 중심에 위치한 팔달산은 143m 높이의 야트막한 산으로, 수원의 주산인 광교산을 멀리 바라보며 안산으로 자리 잡고 있다.
팔달산이라는 이름은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이었던 이고(李皐, 1341∼1420)와 관련이 깊다. 이고는 공민왕 23년(1374) 문과에 급제한 후, 공양왕 1년(1389)에 집의에 오른 사람으로 한림학사와 집현전직제학을 지내다 사직하고 수원의 광교남탑산(光敎南塔山)에 내려와 살았다.
한번은 공양왕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근황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집 뒤에 있는 탑산의 경치가 아름답고 산정에 오르면 사통팔달하여 마음과 눈을 가리는 게 아무것도 없어 즐겁습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후, 은거하던 이고에게 태조가 삼사좌승(三司左丞)‧경기우도안렴사(京畿右道按廉使)를 권했다. 이고가 벼슬을 거절하자 태조는 화공을 시켜 탑산을 그려오게 했다. 태조가 그림을 보고 "과연 사통팔달한 산이다"라고 한 후부터 탑산은 팔달산(八達山)으로 불리게 되었다.
사통팔달한 산'의 면모가 제대로 인정을 받은 것은 정조대에 이르러서다. 정조가 수원의 읍치를 화성에서 팔달산 아래로 옮겼기 때문이다. 원래 수원의 읍치는 화성군 봉담면 와우리와 태안읍 송산리․안녕리 일대였다. 정조 13년(1789)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화산으로 옮기면서 "산 아래의 지세가 탁 트이어 큰 고을이 될 수 있는 곳"이라며 수원읍치와 민가를 팔달산 아래로 옮겼다. 그리고 5.7km의 화성을 쌓으면서 수원 읍치는 화성에서 지금의 수원으로 옮겼다. 이쯤 되면 팔달산이 수원을 읍치로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팔달산에서 볼 수 있는 것들
팔달산에서 가장 잘 보이는 것은 수원시의 전경과 수원화성이다. 서장대에 올라보면 성곽 일대는 물론 멀리 파장동까지 수원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와 서장대가 성 주변을 살피면서 군사를 지휘했던 곳임을 시원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만 보고 내려오면 팔달산이 품은 수원을 다 본 게 아니다. 팔달산에는 기원전 1천년경의 청동기 시대에 살았던 수원 사람들의 흔적도 남아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125호로 지정된 지석묘군 즉 고인돌이 그것이다(지석묘: 경제력이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진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 팔달산 남쪽 기슭에는 바둑판식 고인돌 4기가 남아 있다. 시민회관 옆의 수원시립중앙도서관 오른쪽 기슭을 따라 팔달산으로 조금 오르다보면 평평한 구릉 위에 1호·2호 고인돌이 서로 가까이 있고 여기에서 위로 100m쯤 떨어진 곳에 3호·4호가 있다.
고인돌만이 아니라 팔달산에는 삼일 독립기념탑과 대한민국 독립기념비도 나란히 있다. 매년 3월 1일이 되면 정치인들이나 수원 시민들이 팔달산 삼일 독립기념탑과 독립기념비를 찾아 참배를 하고 간다.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이 출마에 앞서 헌화를 하고 묵념을 하고 가곤 한다. 선경도서관에서 서장대로 가는 중턱에서는 정조 동상을 볼 수 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팔달산에 오른다. 화성 성곽길이 조성되면서 가볍게 팔달산을 오르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팔달산에 간다는 것은 산에 간다는 것이 아니다. 팔달산에 간다는 것은 수원의 심장에 간다는 것이다.
윤유석 / 문화콘텐츠학박사, 한국외대 겸임교수